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시라카와 덴노 (문단 편집) === 붕어 === 겐큐 2년(1191년), 전란과 지진으로 황폐해져 있었던 홋슈지도노의 재건 공사가 가마쿠라 막부의 지원에 의해 시작되었다(《아즈마카가미》 2월 21일조). 홋슈지도노는 고시라카와인에게는 타이라노 시게코와의 나날을 보냈던 추억의 장소로서 그 재건은 생의 가장 큰 비원이었다. 12월 16일에 고시라카와인은 완성된 고쇼로 옮겨갔다(《교쿠요》 동일조). 공사를 맡았던 나카하라 지카요시(中原親能)와 오에 히로모토에게는 검이 내려졌고(《아즈마카가미》 12월 24일조), 단고노 쓰보네와 요시다 쓰네후사가 쇼군 요리토모에게 감사하는 내용의 서장을 보냈다(《아즈마카가미》 12월 29일조). 홋슈지도노로 돌아오자마자 고시라카와인은 컨디션이 급격히 무너져(《교쿠요》 12월 25일조) 장강당(長講堂) 공양을 위해 로쿠조도노에 행차하는 등 잠시 차도를 보였지만(《교쿠요》 12월 28일조) 윤12월에 다시 발병하여 병상에 누웠다(《교쿠요》 윤12월 16일조). 쾌유를 비는 긴급 대사면령이 내려졌고(《교쿠요》 윤12월 17일조), 호겐의 난으로 유배당한 맏형 [[스토쿠 덴노|스토쿠 상황]]의 사당이나 참수당한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의 묘에도 봉폐(奉幣)가 보내졌으며, [[단노우라 전투]]에서 자결한 [[안토쿠 덴노]]의 불당 건립도 이루어졌으나(《교쿠요》 윤12월 29일조), 병세는 나날이 심해져만 갔다. 겐큐 3년(1192년) 2월 18일에 빗속을 뚫고 고토바 천황이 로쿠조도노로 찾아왔고(《교쿠요》 동일조) 이를 반긴 법황은 고토바 천황의 피리에 맞춰 이마요를 부르기도 했다. 고토바 천황이 돌아간 뒤에 고시라카와 천황은 단고노 쓰보네를 사자로 하여 유조(遺詔)를 전했다. 내용은 홋슈지도노・렌게오인・롯슈지(六勝寺)・도바도노 등의 주요 영지는 천황에게, 다른 인 소유의 영지는 황녀 료코(亮子), 시키코(式子), 요시코(好子), 긴시(覲子)에게 상속한다는 것이었다{《메이게쓰기》(明月記) 3월 14일조}. 법황의 늦둥이 딸로서, 선례를 깨고 여원(女院)이 된 긴시 내친왕(覲子内親王)에게는 인(院) 소유의 영지 가운데서도 가장 큰 규모였던 장강당령(長講堂領)이 내려졌다. 나아가 고시라카와인은 긴시 내친왕을 특히 배려할 것을 고토바 천황에게 당부했다. 그리고 3월 13일 인시(오전 4시경), 고시라카와인은 로쿠조도노에서 66세를 일기로 붕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